가치 있는 삶


너무 좋은 책 《두 번째 산》'시멘트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책 내용을 옮겨 적는 것을 끝마치고, 탕욕을 하기 위해 욕실로 향합니다. 몸을 따뜻한 물에 맡긴 채 이 포스팅의 서두(시작)를 어떻게 시작할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봅니다. 

  곧 생각이 떠오릅니다. 평소 의식으로는 생각해 내기 힘든 단어와 문장, 이야기와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습니다. 이 순간 만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아인슈타인도 부럽지 않습니다. 또한, '언어의 천재'가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너댓 단락의 글이 생각납니다. 

  당장 뛰쳐나가 머릿속의 생각들을 서버에 옮겨 놓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지금 막 옮겨 적기를 마친 이 포스팅의 오타 확인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타 확인이 끝나고 나서야 욕실을 나설 수 있습니다. '오타' 요놈, 참 많이도 보입니다. 내 머리로 기억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보지만 '내 머리로는 어려워! 오타 확인은 바로 수정해 가면서 하는게 가장 정확해!'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좋은 향기의 바디워시를 타월에 몇 방울 떨어뜨린 후 온몸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닦아냅니다. 타월을 바꾼 후 손이 미치지 않는 등을 정성스레 문지릅니다. 이어 헹굼을 마치고 대충 물기를 닦아낸 후 서재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이런 로션을 바르지 않았군! 다시 일어나서 서둘러 로션을 바르고 다시 앉아 보지만, 욕실에서 떠오른 기막힌 글감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물음표?"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정말 환장 할 노릇입니다. 맥이 다 풀리지만, 어쨌든 마무리는 해야 하기에 이렇게 생각나는대로 막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자네의 대나무 씨앗은 무엇인가?"라고 책이 묻습니다.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잠시 생각해보니 저에게도 몇 가지의 '씨앗'이 있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공개할 수는 없지만, 대나무 씨앗처럼 강하고 고귀한 욕구와 마약과 같이 해롭지만 무엇보다 달콤한 유혹의 본능이 존재하고, 두 상반된 욕구가 내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장에 간직하고 있는 궁극의 욕구와 자신을 자신이 게 하는 영혼의 욕구는 살아가는 동안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각자의 '인생 과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일상에서 이 과업을 실천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인생의 과업을 펼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바램이 있다면 "나의 심장과 영혼은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추구하는가?"라고 자문해 보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어지는 글(《두 번째 산》)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좋으니 얻어가시는 게 있길 기대합니다.   


 

지난 포스팅 함께보기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에서,,



Chapter 6

새로운 인생은 행복한 추락 뒤에 온다


시멘트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얼마전 나는 차고 진입로 가까이에 대나무 숲이 있는 집을 산 남자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었다. 이 남자는 대나무 숲을 없애기로 마음먹고 당장 실행에 옮겼다. 대나무를 베어 내고 뿌리는 도끼로 찍어 산산조각을 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땅을 최대한 깊게 파서 뿌리를 들어내었고, 그것도 모자라 제초제를 남아 있는 뿌리 위에 뿌렸다. 그리고 50센티미터가 넘는 그 구덩이에다가는 자갈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는 그 위를 시멘트로 발라 버렸다. 그런데 2년 뒤 거기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초록색의 작은 대나무 싹이 시멘트를 뚫고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못 말리는 대나무였다. 지면 위올 올라오지 않고서는 도무지 참을 수 없었던 대나무였다.


  우리 내면에도 이 대나무와 비슷한 것이 있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구이다. 우리를 둘러싼 문화는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호모 사피엔스)이라고 흔히 가르친다. 때로 학교나 회사는 우리를 한낱 분석적인 뇌일 뿐인 것처럼 대한다. 그러나 계곡에 있을 때 우리는 자기가 진정 어떤 존재이며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깊고 진실하게 파악한다. 또 인생에서 정말 유용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가치관이 바뀐다. 추론하는 뇌는 사실상 우리의 의식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일 뿐임을 우리는 깨닫기 시작한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욕구하는 심장desiring heart이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철학자 제임스 스미스James K. AA Simth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뒤쫓고' 어떤 것을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존적인 상어와 같다. 살기 위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는 욕구가 비롯되는 어떤 부분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구하는 것에 따라 정의된다.


  학예회를 하는 아이들을 보라. 아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최대한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추며, 자기가 하는 동작을 정확하게 하려고 치열하게 집중한다. 이 아이들의 내면에는 슈퍼스타가 되겠다는 소망에, 선생님을 기쁘게 해 주겠다는 또는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갰다는 또는 그저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 충동에 생기를 불어넣는 무언가가 있다. 세상은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시멘트로 덮어 버리는 일을 훌륭하게 해치울 수 있다. 그러나 초록색 대나무 싹은 시멘트를 뚫고 끈질기게 위로 올라간다. 잔인한 어른들은 이 초록색 싹들을 꺽어 놓으려고, 따분한 학교는 이 아이들이 생기를 잃게 만들려고, 궁핍한 가난은 아이들을 굶주리게 만들려고 있는 힘껏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거친 환경에 놓여 있는 아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열에 아홉은 여전히 욕구하고 꿈꾸며 위를 향해 머리를 내민다.


  우리의 감정이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의 감정은 각각의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바랄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러 준다. 열정은 이성의 반대말이 아니다. 열정은 이성의 토대이며, 흔히 분석적인 뇌가 가닿을 수 없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심장이 바라는 궁극적인 욕구(다른 모든 사랑들의 배후에 있는 사랑)는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에게 자기를 몽땅 내놓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자. 당신이 지금까지 봤던 거의 모든 영화는 무언가(임무, 대의, 가족, 국가 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기를 몽땅 바치면서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격렬한 감정을 경험하는 어떤 사람을 다루지 않는가? 예를 들어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에서 주인공 릭은 그의 심장을 깨운다. 그리고 결국 그는 사명감과 욕구로 가득 차서 헌신하는 전인적인 인간이 된다.


  궁극적인 욕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 되기, '나-너'의 유대, 모든 것을 진정으로 내려놓기, 순수한 결합, 공포를 초월하는 친밀함을 성취하겠다는 욕구이다. 영국 작가 루이스 드 베르니에Louis de Bernieres는 소설 《코렐리의 만돌린Captain Corelli's Mandolin》에서 심장이 충족되어 가는 여정의 이 마지막 최고의 순간을 묘사한다. 어떤 노인이 죽은 아내와의 사랑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준다. 노인은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 빠진 경험이 사라지고 없더라고 사랑 자체는 남는단다. 그리고 이건 기술인 동시에 행복한 사건이지. 네 어머니와 나는 그걸 가졌어. 우리는 땅 속에서 서로를 향해 성장하는 뿌리를 가지고 있었지. 아름다운 꽃들이 우리의 모든 가지에서 떨어져 버렸다 하더라도 우리가 둘이 아닌 한 나무임을 우리는 알았단다."

  이것이 충족된 시간이다.



너무 좋은 책 《두 번째 산》'시멘트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영혼이 하는 일

  의식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영혼이다. 당신에게 신을 믿거나 믿지 말라고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작가이지 선교사가 아니다. 선교사는 내 전공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도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믿으라는 말은 분명히 하고 싶다. 당신의 의식 가운데는 형태도 크기도 무게도 색깔도 없는 어떤 부분이 있다. 이것은 무한한 가치와 존엄성을 지닌 당신의 한 부분이다. 이 부분의 존엄성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커지거나 작아지지도 않는다. 신체 크기나 체력에 따라서 커지거나 작아지지도 않는다. 돈이 많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돈이 적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보다 이 존엄성이 더 크거나 작지도 않다.


  영혼은 도덕적 가치를 품고 있으며 도덕적 의무를 감당하는 당신 의식의 한 부분이다. 어떤 강이 있다. 이 강은 자기가 흘러가는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호랑이도 자기가 잡아먹는 다른 동물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가 하는 행위 또는 하지 않는 행위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철학자 제럴드 해리슨Gerald K. Harrison이 말했듯이 우리는 이런 본질을 내면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행동들은 칭찬받기도 하고 비난받기도 한다. 당신의 내면에는 이런 도덕적인 부분이 있으므로 당신이 하는 생각이나 행동에 따라 어떤 부류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개인은 각자 자기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제각기 특정한 수준의 존경이나 호의를 받는다. 또 개인은 각자 자기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존엄성이 모욕당하거나 무시되거나 말살될 때는 분개한다. 노예제가 잘못된 것은 인간 영혼의 본질적인 존엄성을 모욕하기 때문이다. 강간은 분자들의 집합체로 구성된 물리적인 신체에 가하는 폭력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모독하는 것이다. 강간은 외설이다. 철학자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은 외설이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덮어 묻어 버리는 어떤 것이라고 가르친다.


   영혼은 도덕 의식과 윤리 감각의 못자리다. C. S. 루이스가 말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나라에서건 전투 현장에서 달아난 탈영병이나 고마운 사람을 배신한 사람이 칭송받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어떤 동물이 자기장에 의지해 방향을 잡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이런 도독 감각들에 의지해 자기 행위의 방향을 잡는다. 이런 도덕 감각들은 우리 성정 안에 녹아 있다. 이마투엘 칸트도 다음과 같이 썼다.

  "생각하면 할수록 늘 새롭고 점점 커지는 감탄과 경외심에 휩싸이는 두 가지가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 그것이다."(《실천이성비판》뒷부분에 나오는 문구이다-옮긴이)


  영혼이 주로 하는 것은 동경yeam이다. 심장이 다른 사람 또는 어떤 대의와 하나로 녹아들기를 갈망한다면, 영혼은 올바름을 동경하고 선한 것과 하나로 녹아들기를 동경한다.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목적은 자기 영혼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 즉 영혼이 동경하는 선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은 선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자 했다. 자기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목적과 의미를 경험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상실감을 느낀다. 심지어 범죄자나 소시오패스조차 자기가 저지른 악행이 실은 알고 보면 선한 행위라거나 적어도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라는 변명을 만들어 낸다. 자기가 철저하게 악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도덕적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사실을 주어진 어떤 순간에 더 분명하게 의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기가 높은 수준으로 고양된다고 느끼는 어떤 행위를 할 때, 그리고 어떤 나쁜 행위를 할 때, 우리는 도덕적인 합리화를 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실을 존 스타인벡은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 멋지게 묘사한다.

  "인간은 선과 악의 망 안에 사로잡혀 있다. 생활에서, 생각에서, 갈망과 야망에서, 탐욕과 잔인함에서 그리고 아울러 친절함과 관대함에서 모두 그렇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야기이며 또 이것은 감정과 지성의 모든 단계에서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덕과 악덕은 우리의 첫 번째 의식의 날실과 씨실이며, 이것들은 우리의 마지막 의식의 얼개를 이룰 것이다.······ 자기 인생의 온갖 먼지를 떨어낸 사람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질문들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을 선했는가, 아니면 악했는가? 나는 인생을 잘 살았는가, 아니면 잘못 살았는가?


  세계 역사나 현재 사건들을 보면, 얼마난 많은 사건들이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싶은 필요성, 자기가 옳다고 느끼며 또 보살핌을 제공할 필요성, 궁극적으로는 남에게 죄책감을 떠 안기고 자기는 도덕적 우월감을 느낄 필요성에 따라서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도덕적인 충동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좋은 사건들을 설명해 준다. 그런데 이것이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충동에 의해 외곡될 때는 많은 나쁜 사건들을 설명해 준다.

  

  그런데 영혼과 관련해서 특이한 것은 영혼을 강력하고 회복력이 강한 동시에 운둔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자기 영혼이 무언가를 동경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인생의 온갖 즐거움을 누리면서 자기 커리어를 쌓아 간다. 자기 영혼은 저 멀리 어딘가에 떨어져 있는데 오래도록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당신의 영혼이 당신을 찾아낸다. 영혼은 마치 산속 어딘가에 틀어박혀 운둔자로 살아가는 표범과도 같다. 당신은 이 표범의 존재를 오랜 세월 잊어버릴 수 있다. 당신은 세속의 일상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지만 영혼의 표범은 저 멀리 산에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따금 당신 눈에 얼핏 그 표범이 비칠 때가 있다. 멀찍이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당신을 추적하는 그 영혼의 표범이······.


  당신이 그 존재를 희미하게 또는 긴급하게 느끼는 순간들이 틈틈이 있다. 이런 일은 잠 못 드는 한밤중에,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칼들이 가득 든 서랍처럼 온갖 생각들일 밀려들 때 고통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 당신의 영혼에 어떤 문제가 있고, 그 바람에 당신은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이 표범은 친구들이나 가족과 함께 보내는 환상적인 어떤 순간에 찾아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피크닉 테이블 너머에서 활짝 웃고 있는 어린 자녀의 얼굴들을 바라보는 순간이 그런 때이다. 이 순간에 당신은 자기에게 다가온 그런 행복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느끼고, 당신의 영혼은 기쁨으로 넘쳐난다.

 

 그리고 중년이나 노년에 더 많이 부닥치는 순간이 있는데, 이 표범이 산 아래로 내려와 당신 집 현관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그런 때이다. 표범은 당신을 응시한다. 당신은 이 시선을 피할 수 없다. 표범은 당신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 당신은 지금까지 어떤 좋은 일들을 했는가? 당신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는가? 당신은 지금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어 있는가? 이런 순간에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가면을 벗어던져야 한다. 





너무 좋은 책 《두 번째 산》'시멘트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행복한 추락

계곡에 있을 때 운 좋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전인적인 인간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자신은 단지 뇌로만 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여러 재능의 집합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기본적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심장과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깨다는다. 이제 남은 생애 동안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은 심장과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그 실체의 증거가 될 것 같다.


  도대체 어떤 경험 덕분에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 있느냐고 물을 때 "하와이에서 멋진 휴가 여행을 보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형편없이 천박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보통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들을 화제로 삼아 얘기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맬컴 머거리지Malcolm Muggeridge는 이런 못브을 좀 지나칠 만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75년 인생을 살면서 배운 모든 것, 나의 존재를 진정으로 고양시키고 계몽시켰던 모든 것은, 내가 힘들게 추구했던 행복이든 또는 거저 얻은 행복이든 간에 행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고 백 번이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계곡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가? 그것은 지금까지 유용했고 또 즐거웠던 어떤 것이 그만 사라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없어져야 할 그 어떤 것은 첫 번째 산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구축했던 인상적이고 합리적인 존재 방식인 '자아의 자기ego self'이다. 사람들은 첫 번째 산의 과업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즉 세상속으로 돌진해 자기 길을 해쳐 나가면 일자리를 얻고 자기의 흔적을 남기며 자기만의 정체성을 쌓아 나가기 위해 '자아의 자기'를 개발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자기가 그 아래 존재한다.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자기에게서 이상적 자아를 몰아내는 데는 심각한 질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병 발작은 줄곧 두 개의 존재 사이을 이어 주는 어떤 길이었다. 나는 나지막한 아치가 둘러진 어두컴컴한 그 길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짚고서 기다시피 통과해 낡은 인생에서 빠져나와 그 너머에 놓여 있던 더 자유로운 곳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죽음과도 같았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경험하고 통과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수천 가지 거짓, 위선, 편견, 버릇, 그리고 넓은 고속도로를 따라 늘어선 군중들이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그 온갖 세속적인 먼지들을 결코 벗어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낡은 자아가 사라지고 나면 심장과 영혼이 나서서 통제권을 장악 할 공간을 확보한다. 과거의 욕구들은 폐기되고 더 큰 욕구들이 형성된다. 이런 움직임은 "내면을 심화하고 외면을 확장한다"라고 임상심리학자인 대프니 드 마네프Daphne De Narneffe는 말한다.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면 오로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이들에게 봉사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여러 소망들이 거기에 있을 깨다는다. 시인 릴케도 말했다.

  "바로 그때, 내 안에 두 번째 인생,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더 큰 인생이 들어설 공간이 있음을 깨닫는다."


  '자아의 자기'가 소멸하고 심장과 영혼이 등장할 때 사람들은 두 번째 산에 오를 준비를 끝낸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은 이것을 또 다른 등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것을 '추락'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어떤 것을 떠나보냈으며, 또 자기 자신을 통해 추락한다. 그 다행스러운 추락으로 자기를 밀어 넣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진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훨씬 더 큰 어떤 것들에 패배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붙잡아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도록 하려면 우리는 인생을 믿고 소명에 공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


  당신은 이제 통제를 받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나서서 세상을 감동시켜야 할 필요도 없다. 당신은 첫 번째 산에서 기술을 습득했으며 계곡에서 지혜를 얻었다. 이제는 커다란 모험을 할 때인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썼다.

  "씨를 뿌릴 시기는 지났고 지금은 수확 할 시기이다. 도움닫기는 이미 했고, 이제는 뛰어오를 때이다. 준비는 끝났고 이제는 실천할 때이다."


  1849년에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는 단 한순간에 자기의 계곡을 경험했으며 또한 이어서 회복의 시작을 경험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 무리의 다른 혁명가들과 함께 노역형을 선고받았다가 최소되고 다시 사형 선고를 받아 투옥되어 있었다. 수의를 입은 이 죄수들은 다시 사형 선고를 받아 투옥되어 있었다. 수의를 입은 이 죄수들은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총살형을 집행할 군인들이 정렬했고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죽음은 코앞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황제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전령이었다. 황제가 관용을 베풀어서 사형 선고를 거두고 원래의 선고 결과대로 노역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총살형이며 감형이며 하는 것들은 황제가 죄수들에게 감동과 충성심을 이끌어 낼 목적으로 미리 짜 두었던 각본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코앞까지 갔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울음을 터트리며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다. 또 다른 사람은 미쳐 버렸다. 자기 감방으로 돌아온 도스토옙스티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 순간을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돌아보면 그날만큼 행복했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쉬지 않고 계속 방을 걷고 또 걸었고······ 계속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생명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자기 형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마음에는 이제 그동안 거치적거리던 모든 사소한 의문들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바로 그 순간에야 비로서 내가 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에 허비하고 비방과 실수와 나태와 무능함 속에서 흘려보내 버렸는지, 소중한 것들을 얼마나 사소하게 여겼는지, 내 심장과 영혼을 거슬러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돌이켜 생각한, 내 심장에 상처가 나고 피가 흘러."

  그는 자기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걸 느꼈다.

  "지금처럼 풍성하고 건강한 정신적인 삶을 느꼈던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 이제 내 인생을 바뀔 거야. 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삶은 선물이야. 삶은 행복이야. 모든 1분의 시간이 영원한 행복이야.······ 인생은 모든 곳에 있어, 인생을 바깥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다가 극적으로 사형을 면제받는 일을 경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스토옙스키가 깨우쳤던 교훈을 우리는 대부분 고통의 시기를 거치면서(보통 광야에서 고통의 시간을 거친다) 점진적으로 깨닫는다. 이 교훈은 업적, 확신, 지성 같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이 교훈을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는 과정이나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받는 동안에 깨우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고통의 시기를 거치면서 깨우친다. 우리는 인생에서 사소한 것들을 추구하는 시기를 경험한다.  우리는 거기에 충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시련이 닥치고, 이 시련이 심장과 영혼을 노출시킨다. 심장과 영혼은 우리가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 충족과 기쁨은 저 멀리 봉사의 자리에 놓여 있다. 이 지점에 다다라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을 할 수 있다. 이 시점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두 번재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너무 좋은 책 《두 번째 산》'시멘트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