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제십칠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아뇩다라샴막삼보리 : 부처님의 완전한 깨달음을 의미하는 불교 교리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제십칠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위없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원을 세운 사람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며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수보리는 다시 한 번 부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내고, 그리고 그 모두를 열반에 들게 했어도 사실은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길의 출발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게 아닙니다. 이생에서 복을 받아 부자로 오래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어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의 이상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도 괴로움이 없는 행복, 걸림이 없는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는 곧 열반과 해탈의 증득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혹을 깨치고 지혜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 세상의 모습을 존재하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여기 한 사람이 비단 이부자리에 누워 밤새 악몽에 시달립니다. 실제로는 편안한 잠자리인데도 꿈속에서 밤새도록 괴롭다고 아우성 칩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그 모든 괴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강도에게 쫓기고 맹수에게 쫓기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더라도 꿈을 깨는 순간 두려움도 괴로움도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미혹을 깨치면 모든 괴로움과 속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가 악몽을 꾸면서 괴로워하는 동안에도 현실 세상에서는 그가 괴로워할 만한 어떤 일도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밤새 편히 누워 있었고, 그의 괴로움은 단지 꿈에 사로잡혀서 생겨났을 뿐입니다.


  지금 나의 괴로움도 그렇습니다. 누간 어떤 사건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닙니다. 내 고집과 내 생각에 빠진 어리석음이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이란 본래 없습니다. 이렇게 괴로움이란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아는 이가 부처고, 본래 없는 괴로움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이가 중생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괴로움이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실은 벗어나거나 사라질 괴로움이란 실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괴로움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지 지금 내 마음이 더 이상 괴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이 괴로운 이유는 괴로움이란 실체가 있어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만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내 괴로움은 괴로워할 만한 일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지은 어리석음, 내가 지어놓은 환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니 무지에서 깨어나 이 괴로움이 환상이라는 것만 깨치면 세상 무엇도 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부모들은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행복해합니다. 하지만 갓난아이는 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달라고 부모를 애먹이지요. 새벽 두 시에 배고프다고 울고 세 시에 기저귀 갈아달라고 울고 밥상 앞에서 똥 누고 졸리면 재워줘야 하고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갓난아이 때문에 괴롭고 답답해서 못살겠다는 부모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부모가 갓난아이에게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조금 자라서 서너 살만 되어도 부모는 아이와 싸움을 합니다. '이제는 말귀를 알아들을 만하잖아. 이것쯤을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누가 날 좀 도와줬으면' '나를 사랑해 줬으면' 하는 사랑받고 싶은 기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이내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거지?'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 걸까?'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하지?' 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또 길가는 사람이나 이웃하고는 싸우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가족하고는 허구한 날 싸웁니다. 이 역시 가까운 사람에게는 '나한테 이만큼은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가까울수록 그에게 바라는 수위는 높아지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괴로워합니다. 그러니 내가 답답하고 괴로운 이유는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레엑 무언가를 바라는 내 마음 때문입니다.


  바라는 마음이 잘못됐다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도 괴롭지 않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너도나도 괴롭다고 아우성을 치면서도 정작 그 이유는 남에게서만 찾으려 하니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그 괴로움의 원인이 바라는 내 마음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꾸 바깥으로 책임을 전가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괴로움만 가중될 뿐입니다. 









집착의 습기


  어떤 이유로,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을 일으킨 이는 바라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동안 나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내가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면, 내는 그만큼 내 괴로움이 줄어듭니다.


  이렇게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을 돕겠다는 마음이 점점 커지면, 그것이 바로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면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행복과 자유로 가는 길은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이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일체중생을 다 제도해 마쳤다 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것 또한 바라는 마음이므로 그런 마음으로는 괴로움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마음을 내되, 그 마음마저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편이 급한 친구가 있어서 그에게 백만 원을 도와주었습니다. 그가 도움을 청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자진해서 호의를 베풀었는데도 내 마음에는 '내가 너를 도와줬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게 보통입니다. 반대로 내가 형편이 어려워 친구에게 백만 원을 빌려 썼다면 나중에 돈을 갚으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내가 그에게 백만 원을 주었다는 생각이 남지 않습니다. 그 돈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합니다. 그의 돈을 그에게 돌려줄 것뿐이니까요.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제십칠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이렇게 그 돈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줄 알면 돈을 주고도 주었다는 마음이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그 돈이 내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내가 그에게 존을 주었다는 마음이 남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준 뒤에 도와줬다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내 것'이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만물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거기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실상을 깨치면 남을 도와주고도 도와줬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빛 갚는 마음으로 내어주라는 말은 사실 하나의 방편일 뿐입니다. 내 것이 아닌 이치를 분명히 알면 '빚을 갚는 것'이라는 식의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자꾸만 내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빚을 갚는다는 생각을 해서라도 내 것임을 고집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베푼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든 게 내 빚이다. 전생에 신세 진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거운 기대감에 발목 잡히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근본은 내 것이란 본래 없다.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는 구분은 다 내 생각이 지어놓는 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깨끗하다·더럽다, 높다·낮다, 생긴다·사라진다, 만법이 다 생각 따라 마음 따라 일어납니다. 이 이치를 깨닫고 집착을 버릴 수만 있다면 마음은 금세 편안해집니다. 그 실상을 깨친 자리에는 일체 번뇌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집착이 그렇게 쉽게 단번에 버려지지가 않습니다. 가족, 사업, 건강, 연애 등등 그 어떤 이유로 괴로워하던 사람이라도 불법을 알게 되면 자기의 괴오움이 집착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괴로움의 원인을 알았다고 해서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 때문임을 알면서도 그 집착을 놓지 못한다는 괴로움까지 더해져 오히려 더 큰 괴로움에 허덕이기도 합니다. 집착을 놓지 못하는 자기가 한심하게 여져겨 자기 비하와 탄식의 수령으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또는 괴로움의 원인이 내 집착 때문이라는 걸 알고 나서 집착을 좀 놓은 것도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다시 집착을 하게 되는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남들은 잘되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안될까 비교하는 마음까지 들어서 더 괴로워집니다. 전에는 '돈만 벌면 마음이 좀 편안해질 텐데' 하고 아쉬워하다가, 이제는 '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마음이 편안해질 텐데' 하고 아쉬워하니, 결국 집착에 매이기는 불교공부를 하기 전과 후가 다르지 않은 꼴입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젖어온 집착의 습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돈에 집착했던 탓에 마음이 괴로운 상황을 자초했다면, 이제는 마음을 편안함에 집착해서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돈에 집착할 때에는 남보다 더 빨리 쉽게 돈을 벌 욕심에 가득 차 온갖 궁리를 했다면, 이번에는 빨리 도글 구하려는 마음에 명상을 했다, 참선을 했다, 염불을 했다 하며 우와좌왕합니다.


  몸에 밴 집착하는 버릇을 뿌리 뽑지 못한 사람은 설령 재물에 대한 욕망을 놓더라도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 새로운 집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공부는 공부대로 진전이 없고 마음만 불안하고 초조해집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공부의 핵심은 집착은 놓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곧 무아의 이치를 터득하는 데이 있습니다.









빙긋이 웃지 못하는 이유


  부처님이 걸식 중에 한 바라문의 집을 들렀는데, 그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큰 소리로 욕을 퍼부어댔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바라문을 쳐다보며 빙긋이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저 빙긋이 웃으셨다니, 대체 어떤 마음이면 그럴 수 있을까요. 남이 내게 욕을 해도 빙긋이 웃을 수 있는 무슨 비법 같은 게 있는 걸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에 빠져서 매사를 판단합니다. 부처님이 걸식을 위해 집 앞에 섰을 때에도 '수행자가 우리 집에 공양을 얻으러 왔구나. 내게 복 지을 기회를 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오늘 아침부터 재수 더럽게 없네. 왜 아침부터 거지가 집 앞에 와서 서성대는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현상을 대하는데 사람마다 다 다른 마음이 일어납니다.


  봄비가 내리면 땅 속에 묻혀 있던 씨앗들이 너도나도 싹을 틔웁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새싹이 젖은 흙을 밀치고 올라옵니다. 같은 땅, 같은 햇빛, 같은 수분, 같은 조건에 처해 있는데도 수없이 다른 종류의 싹이 올라오는 이유는 씨앗이 달라서입니다. 그처럼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사람마다 제각각 생각이 다른 것은 저마다 마음의 씨앗인 업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좋다는 마음도 자기 씨앗으로부터 일어나고, 싫다는 마음도 자기 씨앗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부처님이 빙긋이 웃으신 이유도 바라문의 그러한 마음자리가 훤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일에 빙긋이 웃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숱한 망념,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제십칠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