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시와 산책_한정원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새는 날씨에 따라 다른 음률로 지저귀고, 순록은 계절에 따라 눈동자 색을 바꾼다. 내가 퍽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숲을 향해 고요한 귀를 내밀면, 새가 그런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함박눈이 내릴 때, 태풍을 앞두고 있을 때, 화창할 때, 높낮이와 빠르기가 달라지는 새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근사한 악보이다. 새소리를 기보한 작곡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다.


    하지만 순록의 눈동자가 금색에서 푸른색으로, 다시 푸른색이 얼비치는 금색으로 변하는 순간은 어떨까. 사계절 순록의 뒤를 밟아 그 신비를 목격할 기회는 아마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와 닯은 변신이 자연의 다른 부분에도 존재하지 않을까.


    내가 찾은 것은 호수이다. 소로우는 1846년 3월의 일기에서, 얼음이 녹고 봄의 징후가 찾아온 호수를 보며 이렇게 적었다. "봄의 신호는 하늘에 나타나기 전에 먼저 호수의 가슴에 비친다."


    내가 그보다 늦게 4월의 한가운데에서 호수를 보았을 때, 호수의 가슴에는 엷은 분홍빛이 감돌았다. 호숫가 둘레를 수십 그루의 벚나무들이 감싸 안고 있어서이다. 벚꽃은 절정에 다다라 꽃잎을 떨구기 시작했고, 물 위에서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간혹 물오리들이 지나가며 꽃 무더기를 흩트리곤 했다.


    한낮을 틈타 꽃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단숨에 지나가기도 했고, 사진을 찍느라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기도 했고, 뒤쳐지는 개를 기다리느라 걷다가 자주 멈추기도 했다. 저마다 다른 속도가 있어 길이 다채로웠다.


    나는 천천히 걷다가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놓인 벤치 앞에 섰다. 한 노인이 호수를 향해 앉아 있어서, 볕을 고스란히 받는 그의 굽은 등을 보았다.


    머리 바로 위에서 벚나무 가지가 흔들리자 등 위에 드리워진 가지의 그림자도 덩달아 바람을 맞았다. 그가 하염없이 한곳을 바라보기에 나도 따라 보았더니, 하필 주름 같은 물결과 낙화가 눈에 뜨였다. 노인은 꽃그늘 밑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늙는다는 것을 나는 어려서부터 생각해왔다. 서른과 마흔의 나는 궁금하지 않은데, 일흔 즈음의 내 모습은 보고 싶었다. 중간의 시간을 다 살아내는 일이 막막하기만 해서, 끝을 떠올리길 버릇했는지도 모르겠다.


    팔다리가 나무처럼 굳어가고, 호흡이 가빠지고, 덜 보이고 덜 들리게 될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까. 아껴 움직이고, 아껴 말을 하고, 아껴 보고 듣게 될까. 아껴 사랑하게 될까 아니면 사랑을 아끼게 될까.


    노인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은 뼈가 비워지는 탓이겠지만,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단념해서 버려지는 무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노인의 등을 가만히 보며, 나는 그 반대편 가슴 안에 머무는 색에 대해 생각했다.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색이라면, 무엇이든 마음에 들이고 보내며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도 색이 있을 테니까. 어느 물감도 따라 잡지 못할 만큼 찬연한 색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어쩌면 그는 이제 색이 바랬다고, 혹은 아예 색을 잃었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늙음일 것이다.


    대개 서른, 마흔, 예순 같은 나이에 큰 의미를 두고 '꺽인다'는 표현을 쓴다. 나는 삶을 꺽이게 하는 것은 그보다는 '사건(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주로 나쁜 사건개인의 불행이나 세계의 비극―을 겪는 순간이라고. 그래서일까. 나는 덜 늙고서도 늙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보내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들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몸의 관절이 오래 쓰여 닳듯, 마음도 닳는다. 그러니 '100세 인생'은 무참한 말일 뿐이다. 사람에게는 100년 동안이나 쓸 마음이 없다.


    사람의 색이 바래거나 사라지지 않고, 순록의 눈동자나 호수의 가슴처럼 그저 색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계절에 따라, 나이에 따라, 슬픔에 따라. 그러면 삶의 꺽임에도 우리의 용기는 죽지 않고, 무엇을 찾아 멀리 가지 않아도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목격하며 너르게 살아가지 않을까.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내가 귀하게 여기는 한 구절이다. 

    노인을 경외하는 것은, 내가 힘겨워하는 내 앞의 남은 시간을 그는 다 살아냈기 때문이다. 늙음은 버젓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결과일 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열차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그러하듯, 흔들림 없이 잘 멈추기 위해서 늙어가는 사람은 서행하고 있다. 


    반면 나에게는, 지나야 할 풍경이 조금 더 남아 있다. 써야 할 마음도 조금 더 있다. 그것들이 서둘러 쓰일까 봐 혹은 슬픔에 다 쓰일까 봐 두려워, 노랑이처럼 인색하게 굴 때도 있다.


    그날 노인의 뒤에 서서, 그에게는 위로로써 나에게는 격려로써 저 시구를 읊조렸다. 노인에게는 멈추는 힘이, 나에게는 나아가는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노인의 등을 바라보고, 노인은 호수의 가슴을 바라본다.


   

《시와 산책_한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