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이 나의 시선이 되다
인정 구걸
신경증 환자들은 자유롭게 연상하가다가도 치료자에게 창피함을 느끼고 자꾸 감추려 듭니다. 남의 평가에 민감한 것이죠. 결부 짓기를 좋아하고, 자기보다 오히려 남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고 자기중심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남이 자신을 어찌 볼지, 비난하지 않을지 전전긍긍합니다. 심하면 몸이 떨리고 손이 떨려 글씨도 잘 쓰지 못하고 커피 잔도 겨우 듭니다. 비난이나 칭찬은 남의 의견일 뿐인데도, 우리는 남의 것과 나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평가나 심판은 어려서부터 주입된 것인데 이제 자기 자신의 것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애쓰며 남의 칭찬과 인정을 애걸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보십시오.
스카이캐슬을 향한 강박
어떤 초등학생이 시험에서 70점을 맞고는 성적표에 사인해 달라고 엄마에게 요청합니다. 엄마가 "겨우 70점밖에 못 맞았니?" 하고 야단치지요. 이후로 아이는 열심히 공부하였지요. 다음 시험에 90점을 맞았습니다. 이번에는 엄마가 기뻐 하시겠지 하고 기대했지만 엄마는 "10점만 더 맞으면 100점일 텐데···."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이번에는 더욱 열심히 하여 기어코 100점을 맞았습니다. 엄마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너희 반에 100점 맞은 애가 몇 명이나 되니?"
이제 아이는 엄마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고 절망합니다. 아이는 커서도 일과 대인관계에서, 배우자와 자녀 관계, 어떤 것에서도 즐기지 못합니다. 다음, 또 다음을 향해 쉬지 ㅇ낳고 성공가도를 달리느라 모든 걸 희생합니다. 상담 치료자가 "그렇게 성공가도를 달리고 마지막에는 무엇을 할 겁니까?"라고 물으니, 내담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편히 쉬려고요."
아닙니다. 해결책은 지금 쉬면서 현재를 즐기는 것입니다. 지금 쉬지 못하고 편하지 않다면 영원히 편할 수 없습니다. 성공할 때까지 쉽과 행복을 미루지 않는 게 삶을 즐기는 길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잠깐 멈추고 일 분간 호흡을 바라보고 일 분간 몸의 감각을 느끼고 일 분간 생각과 감정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쉬게 해 주세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사회적으로 일류병을 만듭니다. 일등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성적 지상주의와 업적 지상주의가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숙고 명상은 이러하고 있음을 바라보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습관들을 알고 찌꺼기를 덜어내고 해로운 것은 버립니다. 밝고 긍정적인 걸로 대체합니다. 열등감 치유는 일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함으로써 이뤄집니다.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처럼 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에게도 일등에게 보내는 찬사와 칭찬을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자신의 온 힘을 발휘하여 꼴찌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는 마음이 곧 평등한 자비요, 사랑입니다.
삶을 지키게 만드는 주범
트라우마의 재연 극장
무의식의 힘은 의식이 이길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작용하여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의식은 원하는 바가 달성되기 전에는 집요하게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 시적 겪은 트라우마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으려 들지요. 내면의 재잘거림도 사실은 그 트라우마에서 비롯합니다.
그 트라우마 상황을 재현하고 재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상처 받았고 그때 기분과 감정은 어떠했으며 그에 따른 생각들은 어떠했고 결론은 어떻게 내렸는지를 보아야 트라우마의 지배에서 놓여날 수 있습니다.
기억할 수도 없는 영유아 시절의 상처와 그에 따른 훈육과 형성된 습관을 붓다는 "뿌리 깊은 경향"이라 표현하였습니다. 뿌리 깊은 경향에 의해 우리는 인식 과정이 왜곡되고 부정적인 경험으로 오염된 생각들로 살아가게 됩니다. 정신을 포함한 여섯 감관에서 대상을 만나 각각의 의식이 생겨나는 것을 접촉이라 합니다.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정신)이 각각의 대상(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사실)을 만나면 느낌이 발생하고, 그 느낌에 대해 분별하고, 분별한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에 여러 과거의 기억과 체험들의 연상이 덧붙여저 생각은 솜사탕처럼 부풀려집니다. 이렇게 해서 있는 그대로 실상을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왜곡된 선입견으로 보면서 탐착하고 분노하고, 그렇게 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며 일히일비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여러 기억들에 의해 연상된 개인적인 생각과 사회가 주입시킨 신념들로 물든 색안경을 낀 상태가 된다는 것인데, 이 색안경으로 사물을 보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비참한 결말을 낳습니다. 관계마다 왜곡이 일어나서 갈등과 충돌을 일삼습니다. 사건마다 예단을 하고 억측하는 오염된 생각들은 갖가지 물감으로 더럽혀진 옷감과 같고, 탁한 연못과 같아져서 적대적으로 주장하고 언쟁합니다. 극한으로 가면 망상과 환각까지 동반되어 배우자를 의심하고,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하기에 이릅니다.
분노 속의 두려움
두려워서 떠드는 에고
분노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과 똑바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짜증부터 맹렬한 분노까지, 모든 화를 포함합니다. 에고는 자신이 피해를 보았다고 느끼면 "그 사람이 그렇게만 안 했다면···" "대체 그 사람은 왜···"라며 타인을 비난하거나 "그때 왜 그렇게 바보같이 굴었을까?" "이렇게 했어야 됐어!"라고 스스로를 비난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 깊은 데서 솟아 나는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절망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분노의 중심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면에서 이렇게 끊임없는 독백을 하고 있는 것은 두려움에 기초한 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 분노, 거기서 비롯된 절망이 너무도 겁나서 그것들이 보이지 않도록 정교한 방어 시스템을 만듭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음식, 약물, 술, 바쁜 일상, 인터넷, 텔레비젼, 쇼핑 등 탐닉과 중독의 수렁 속에서 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평가받을 때 몸을 잘 관찰해 보면, 몸이 긴장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두려움은 긴장성 두통, 호흡 곤란, 뻣뻣한 목, 위장 장애, 요통 등을 일으킵니다.
두려움을 피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쓸수록 두려움은 더 크게 우리를 괴롭힙니다. 두려움과 직면하는 용기기 필요합니다. 두려움은 직장에서, 집에서, 친구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민감에게 반응합니다. 이때 상대방을 보지 말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중얼거리는 두려움의 이야기들을 자각하고 경청하면 중얼거림들은 슬며시 사라집니다. 에고가 지어내는 이야기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경청하는 순간 내면의 소음이 조용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늘 함께하는 고요함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마치 구름이 걷히면 보낼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이.
<명상하는 깨나>
김찌입니다. 오랜만에 명상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읽고 있는데, 내용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몇 꼭지 소개하였는데요. 이 밖에도 좋은 내용의 글이 정말 많습니다. 소장하고 있는 20여 권의 명상 서적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뽑을 정도로 구성과 내용이 좋았고, 명상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의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명상을 하면서 좋았던 점 한 가지는, 명상을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점입니다. 좋지 않은 일이 생겨 괴로움과 고통을 느낄 때,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이 있을 때, 외롭다고 느낄 때, 명상을 하고 나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평화스럽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단지 몇 십 분,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면서 떠오르는 생각과 몸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알아차린 것뿐인데, 명상을 하기 전과 하고 난 후의 마음 상태가 정반대로 바뀌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명상은 한 마디로 "몸과 마음의 작용 알아차리기"입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을 경험합니다.(물론 처음부터 그 생각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 생각에 휩쓸리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립니다.), 여기서 생각을 경험한다는 것은, 지금 떠오른 생각(에고가 현재 하고 있는 생각)을 떨어져 바라보아서 정확히 인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같은 방법으로, 내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반응들(통증, 가려움, 따가움, 차가움, 따듯함)을 느끼면서 "아. 지금 내 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에고가 이런 느낌을 받고 있구나!"라고 현재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순간 고통을 잦아들고, 감각은 없어지거나 위치를 달리하게 됩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여서 알아차리는 순간 생각은 중단되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또다시 생각(잡념)이 찾아들지만, 곧 사라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데, 이것이 명상의 효과인데, 이 정도는 초기단계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좋은 컨디션으로 출근을 하고 있는데, 앞에 달리는 초보 운전자는, 자신의 앞차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긴?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주행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도로에서 시간 낭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김찌는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서, 급기야는 경적을 울리고 추월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반대쪽 차선의 차들이 많아 추월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명상을 그렇게 하고도 아직 모른단 말이야?"하고 깨닫기 시작합니다. 에고의 짜증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괜찮아. 좀 늦을 수도 있는 거고, 앞차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 초보 운전자라서 그러는 거고,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웃으며 에고를 달래줍니다. 사실 차가 막히거나, 어떤 이유로 도착시간이 많이 늦어질 것 같은 상황을 보면, 실제로 도착시간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일상의 명상이란 이렇듯, 일상의 어느 순간에 벌어지는 '에고의 작용'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나'라고 알고 있는 에고의 생각과 감정, 감각을 정확히 인지하여 불필요한 반응을 억제시켜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 즉 평온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일상의 명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생각, 감정,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느끼는 주체는 내가 아닌 '에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고를 곧 '나'로 생각하거나 에고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생각, 감정, 오감에 구속되어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갑니다. 상처도 많이 받고요.
그렇지만 만약, 에고의 반응을 알아차리고, 나 스스로를 에고 너머의 존재로 받아들인다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현상(모든 게 에고의 반응이고 두뇌의 작용이다)을 영화 관람하듯 재밌게 지켜볼 수 있을 겁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사람들의 '에고'이지 본연의 '그들'이 아님을 이해한다면, 타인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연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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