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미움받을 용기》 타인의 과제 버리기

 

 

'과제를 분리'하라

 

 

 

철학자 

예를 들어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세. 수업시간에는 딴청을 부리고 숙제도 하지 않고, 툭하면 교과서를 학교에 두고 오지. 만약 자네가 부모라면 어떻게 할 텐가?

 

청년

물론 온갖 수단을 써서 공부를 시키겠죠. 학원에 보내거나, 가정교사를 붙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귀를 잡아끌어서라도 책상에 앉혀야죠. 그것이 부모의 책무니까. 실제로 저도 그렇게 컸어요. 그날 숙제를 마칠 때까지 저녁을 먹지 못했습니다.

 

철학자

그러면 하나 더 묻지. 그런 강압에 못 이겨 공부를 하게 된 결과, 자네는 공부를 좋아하게 됐나?

 

청년

안타깝게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라고 하니까, 대학에 가려면 시험을 봐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거죠.

 

철학자

알겠네. 그러면 아들러 심리학의 기본적인 입장부터 설명하겠네. 예를 들어 눈앞에 '공부한다'라는 과제가 있을 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것이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네.

 

청년

누구의 과제인가라고요?

 

철학자

아이가 공부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 혹은 친구와 놀러 가는가. 가지 않는가. 원래 이것은 '아이의 과제'이지 부모의 과제가 아닐세.

 

청년

아이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겁니까?

 

철학자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아이 대신 부모가 공부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지 않나?

 

청년

뭐 그건 그렇죠.

 

철학자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일세. 거기에 대고 부모가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에, 비유하자면 흙투성이 발을 들이미는 행위일세. 그러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지.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청년

분리해서, 어떻게 한다는 거죠?

 

철학자

타인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뿐일세.

 

청년

˙˙˙˙˙˙그것뿐, 이라고요?

 

철학자

모든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대부분 타이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 -혹은 자신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 에 의해 발생한다네. 과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간관계가 급격히 달라질 걸세.

 

청년

음, 잘 모르겠네요. 대체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어떻게 구분하죠? 솔직히 제 관점에서 보자면,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은 부모의 책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알아서 공부하는 아이는 거의 없는데다, 누가 뭐래도 부모는 보호자니까요.

 

 

 

 

 

 

 

 

철학자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그 선택일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약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정이 가져올 결과 -이를테면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거나 지망하는 학교에 불합격하는 등- 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야. 아이란 말이지. 즉 공부는 아이의 과제일세.

 

청년

아뇨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인생의 선배이자 보호자이기도 한 부모에게는 아이에게 "공부해"라고 타이를 책임이 있어요. 이것은 아이를 위한 것이지 과제를 침범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일지 모르지만, '아이를 공부시키는 것'은 부모의 과제예요.

 

철학자

세상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 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 -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 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청년

그러면 아이가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아이의 과제니까 방치하라는 겁니까?

 

철학자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네. 아들러 심리학은 방임주의를 권하는 게 아닐세. 방임이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라네. 그게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공부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걸세. 단 아이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하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청년

부모 자식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죠?

 

철학자

물론이지, 이를테면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상담 시에 내담자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는 카운슬러의 과제가 아니라고 여기네.

 

청년

왜죠?

 

철학자

상담을 받을 결과, 내담자가 어떤 결심을 했는가, 생활양식을 바꿨는가, 바꾸지 않았는가, 이는 내담자 본인의 과제고 카운슬러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청년

아니아니, 그런 무책임한 태도가 허용된다니요!

 

철학자

물론 곁에서 최선을 다해 돕기는 하지. 하지만 끝까지 개입하지는 않아. 어느 나라에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네. 아들러 심리학에서 하는 상담, 혹은 타인에 대한 지원 전반이 그런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게. 본인의 의향을 무시하고 '변하는 것'을 강요해봤자 나중에 반발심만 커질 뿐이지.

 

청년

카운슬러는 내담자의 인생을 바꿔주지 않는다는 겁니까?

 

철학자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미움받을 용기》 타인의 과제 버리기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청년 

그럼, 예를 들어 은둔형 외톨이의 경우는 어떤가요? 다시 말해 제 친구와 같은 경우요. 그래도 과제를 분리해라, 함부로 개입하지 마라, 부모는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실 겁니까?

 

철학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빠져나오지 않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이는 원칙적으로 본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일세. 부모가 개입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생판 남도 아니니 어느 정도 지원을 필요하겠지.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궁지에 몰렸을 때 순순히 부모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가, 평소에 그런 신뢰관계를 쌓아 놓았는가 하는 점이 되겠지.

 

청년

그러면, 가령 선생님의 아이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철학자로서가 아닌 한 아이의 부모로서 대답해주세요.

 

철학자

일단 나는 '이것은 아이의 과제'라고 생각하네.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에 대해 개입하려 들지 않고, 과도하게 관심을 갖고 살피는 것을 그만둘 걸세. 그런 다음 곤경에 처했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낼 거야. 그러면 부모의 변화를 눈치챈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신의 과제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도움을 구하거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할 걸세.

 

청년

실제로 아이가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도 그렇게 단언하실 수 있겠습니까?

 

철학자

아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부모는 대게 '아이의 인생은 곧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요컨대 아이의 과제까지도 자신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떠안는 걸세. 그렇게 늘 아이만 생각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인생에서 '나'는 사라지고 없지. 하지만 어느 정도 아이의 과제를 떠맡았다고 한들 아이는 독립적인 개인일세. 부모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진학할 학교나 직장, 결혼 상대, 일상의 사소한 언행마저도 부모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네. 당연히 걱정도 되고 개입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 않나. "타인은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령 내 자식이라도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청년

가족끼리도 선을 그으란 말씀입니까?

 

철학자

오히려 거리가 가까운 가족이야말로 더 의식적으로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청년 

말도 안 돼요! 선생님, 선생님은 한쪽에서는 사랑을 말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사랑을 부정하고 있어요! 그렇게 타인과 선을 그어버리면 누구도 믿을 수가 없게 된다고요!

 

철학자

믿는다는 행위 또한 과제의 분리일세. 알겠나? 상대방을 믿는 것, 이것은 자네의 과제일세. 하지만 자네의 기대와 신뢰를 받은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인 걸세. 그 선을 긋지 않은 채 자신의 희망만 밀어붙이면 그건 스토커나 다름없지. 그것이야 말로 하지 말아야 할 '개입'이라네. 비록 상대방이 내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믿을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들러가 말하는 '사랑의 과제'에는 그런 질문까지 포함되어 있다네.

 

청년

어려워요. 어렵다고요. 그것은!

 

철학자

물론이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게.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과 타인의 과제를 떠안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무겁게 짓누른다네. 만약 인생에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면 -그 고민은 인간관계에 있으니- 먼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라고 경계선을 정하게. 그리고 타인의 과제를 버리게. 그것이 인생의 짐을 덜고 인생을 단순하게 만드는 첫걸음일세.

 

 

《미움받을 용기》 타인의 과제 버리기

 

 

'나'로 살아가기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나'와 '타인'을 분리시키는 게 아닐까. 그런 다음, '내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고,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여, 불필요한 감정을 생산하지 않으면, 좀 더 '내 삶'에 집중하면서 주어진 일상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효孝란, 만들어주신 삶을 '가장 나답게 잘 살아내는 것'이다. 비슷한 의미로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자식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여 '가장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 주는게 아닐까 한다. 며칠 전이이었던가. "쉬엄쉬엄 해. 게임도 한 판씩 하고,"라고 아들에게 말했었다. 이에 아들은 "기말고사가 한 달 밖에 남지 않아서 공부해야 해. 이번엔 과목이 늘어났어"라고 말하였다.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느끼면, 알아서 척척! 스스로 잘 해나가는 것 같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의 거울과 같기 때문에, 정작 살펴야 할 것은 아이의 과제가 아닌 부모 자신의 과제가 아닐까! 세상 모든 부모의 공통된 과제는 '아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