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찌입니다. 오늘 읽었던 책 중에서 여러분들께 꼭 소개 시켜 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포스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사색의 시간도 꼭 가져보시길 당부 드립니다.
<자기신뢰>,<자유론>,<독서와 논술1>,<자기를 위한 인간>,<소유냐 삶이냐/사랑한다는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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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머뭇거리며 변명만 늘어놓는다. 자신의 다리로 굳건하게 서 있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또는 "나는 이렇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고 성인과 현자의 말을 인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풀잎이나 활짝 핀 장미 앞에 서면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 방 창문 아래 피어 있는 장미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 장미는 있는 그대로 그저 피어 있을 뿐이며, 신과 함께 오늘을 살고 있다. 장미에게는 시간이 없다. 단지 장미로 존재할 뿐이다.
장미는 존재하는 매 순간 완벽하다. 잎 눈이 트기 전에도 장미의 온 생명은 활동한다. 꽃이 활짝 피었다고 생명 활동이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잎이 떨어져 뿌리만 남았다고 생명 활동이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장미의 본성은 어떤 순간에도 똑같이 만족하고, 자연도 장미의 존재에 매 순간 만족한다.
하지만 인간은 무언가를 미래의 일로 미룬다는지 과거를 돌아본다. 인간은 지금을 살아가지 않는다. 과거를 돌아보고 슬퍼하고, 지금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풍요에서 눈을 돌리고, 발꿈치를 들고 미래를 넘겨다보곤 한다.
장미처럼 시간을 초월해서 자연과 더불어 현재에 살지 않는다면, 인간은 행복해지지도 강해지지도 못한다.
자기 자신을 고수하라. 결코 모방하지 마라.
태어나면서 받은 능력은 언제든 표현할 수 있고, 세월과 함께 교양이 쌓인 만큼 더더욱 풍요롭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차용한 능력은 임시변통에 불과해서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그를 만든 조물주뿐이다. 자신이 타고난 본분이 무엇인지는 직접 해보기 전에는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셰익스피어를 가르칠 수 있었던 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프랭클린이나 워싱턴, 베이컨, 뉴턴을 가르칠 수 있었던 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위대한 인물은 모두가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셰익스피어를 연구한다고 해서 셰익스피어를 만들어낼 수 없다.
하늘이 당신에게 맡긴 일을 하라. 그러면 무엇이든 희망할 수 있고, 무엇이든 감행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당신은 피디아스의 끝이나 이집트인들의 흙손, 모세나 단테의 펜이 표현해낸 것과 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표현을 얻게 된다. 그때 그 표현은 누구의 것과도 다르다.
천 개의 혀를 가졌으며, 표현이 풍부하고 뚜렷한 그런 영혼이 했던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대가들이 한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당신은 분명 똑같은 어조로 그들에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귀와 혀는 별개의 기관이지만, 그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당신 삶의 소박하고 고결한 영역에서 살아가라. 마음의 목소리에 복종하라. 그러면 당신은 태초의 세계를 다시 이 땅 위에서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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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_존 스튜어트 밀>중에서
인간은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것들을 획일적으로 묶어두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잘 가꾸고 발전시킴으로써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창작물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듯이, 인류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한껏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인간이 발전하게 되면, 우리 삶도 풍요로워지고 다양해지며 활력이 넘칠 것이다. 고귀한 생각과 고결한 감정을 더욱 북돋아 주게 되고,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연대의 끈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각자의 개별성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또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자기 존재에 대해 더욱 충만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각 개인이 이처럼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면, 개인들이 모인 사회 역시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어떤 강력한 것이 다른 요소들의 발전을 저해하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적절하게 억압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자기 성향대로 마음껏 살기 위해서는 각자 다른 삶을 사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어느 시대든 이런 의미의 자유가 허용되는 것과 비례해서 후대에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독창성이 우리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한때 진리였던 것이 이제 더이상 진리가 되지 못하는 때를 간파하는 사람만 소중한 것은 아니다. 남이 하지 않는 관례를 처음 만들고, 더욱 발전된 행동과 더 수준 높은 취향과 감각을 선보이는 사람도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모든 측면에서 이미 완벽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아무나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새로운 실험을 주도할 뿐이다. 사람들이 그 새 길을 따라간다면 사회 전체가 한 단계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이들 소수야 말로 세상의 소금과 같은 존재이다. 이들이 없으면 우리 삶은 정체를 면치 못할 것이다.
<자기신뢰>,<자유론>,<독서와 논술1>,<자기를 위한 인간>,<소유냐 삶이냐/사랑한다는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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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못한 길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 뿐인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덤불 속으로 한 쪽 길이 감돌아간 저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에 못지 않게 아름답고
어쩌면 이 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밟은 흔적은 다 비슷했지만 이 길은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는 듯 해서였습니다.
그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직
발자국에 더렵혀지지 않는 낙엽에 덮여 있었습니다.
다른 길은 언젠가 가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리라 알고 있었지만,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노라고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노라고,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 놓았다"고 말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 미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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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232-233
인본주의적 양심은 우리 참자아의 목소리기도 하지만, 우리가 삶에서 겪은 도덕적 경험의 진수를 담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삶의 목표와 그 목표를 성취하는 데 적용해야 할 원칙들을 인본주의적 양심에 보존한다. 우리가 직접 찾아낸 원칙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운 후에 우리가 옳다고 받아들인 원칙도 인본주의적 양심이란 형태로 보존된다.
인간이 자기 관심과 본래의 모습을 표현하는 방법이 인본주의적 양심이라면, 권위주의적 양심은 순종과 자기희생, 의무 및 '사회적 적응'과 관계가 있다. 인본주의적 양심의 목표는 생산이며, 따라서 행복이기도 하다. 행복은 생산적인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품위 있게 보이더라도 우리가 그 사람의 도구가 되어 자아를 상실한 채 무력하고 불행하며 체념해 살아간다면 양심의 요구에 반하는 것이다. 생각과 행동에서, 심지어 먹는 것의 취향이나 성행위에서 자신의 진실한 바람과 인격의 적절한 기능 작용을 어긴다면 양심에 반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Page.234-236
우리는 양심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서라도 양심과 교감하는 법은 터득해야 한다. 하지만 양심과 교감하는 법은 터득하기란 주로 두 가지 이유에서 무척 어렵다.
첫째, 양심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자신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목소리, 모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정작 자신의 목소리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와 신문, 라디오와 쓸데없는 잡담 등 사방에서 소음처럼 웅웅거리는 소리와 주장에 끊임없이 노출된 채 지낸다. 설령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의도적으로 계획했더라도 이보다 더 잘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귀를 귀울이려면 자신에게 충실하며 혼자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그 능력이 거의 없다. 혼자 있는 것보다 지극히 사소하고 불쾌할 뿐인 사람이라도 그와 함께하며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활동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혼자 있게 되어 자신을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듯하다.
둘째, 양심이 우리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 양심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는 양심과 분명한 관계가 없는 상당수의 이유로 질병에도 불안감을 느낀다. 무시 받는 상황에 우리 양심이 가장 흔히 보이는 간접적인 반응은 막연하고 불분명한 죄책감과 불안감, 혹은 단순한 피로감이나 무력감이다. 때때로 이런 감정들은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으로 합리화되지만, 그 빠뜨린 행위가 진정으로 도덕적인 문제를 실제로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실한 죄책감이 무의식의 차원에 머물더라도 피상적인 합리화로 잠재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면, 훨씬 깊고 강렬한 불안증, 심지어 육체적인 질병이나 정신적인 질환으로 나타날 수 있다.
<자기신뢰>,<자유론>,<독서와 논술1>,<자기를 위한 인간>,<소유냐 삶이냐/사랑한다는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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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245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힘을 실현하고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질을 발휘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사랑이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것만으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은 특정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감정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특정 인물을 사랑하기 위한 전제다.
따라서 내 자아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의 인생.행복.성장.자유의 긍정은 우리의 사랑 능력, 즉 보호.존경.책임.이해 등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자신 또한 사랑하는 것이다. 그가 오직 타인들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Pgae.302
만일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만일 내가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란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만일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를 소중히 여길 때는 또 언제이겠는가.
<솔로몬 탈무드>에서
우리는 그대를 천상의 것도 지상의 것도 안이고, 죽는 것도 죽지 않는 것도 아닌 존재로 창조했다. 그대가 자신의 의지와 명예에 따라 자유로, 그대 자신의 창조자이며 건설자도 되게끔 한 것이다. 우리는 그대에게만 그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성장하고 발전할 기회를 주었다. 그대는 그대 자신 안에 우주적 생명의 밑씨를 가지고 있다.
피코 델라 미란 돌라<인간의 존엄에 대해>
인간이 타고난 불가침의 권리만큼 불변적인 것은 없다. _토머스 제퍼슨
Page.491-492
자아의 실현으로 얻은 적극적인 자유는 개인의 독자성을 충분히 긍정한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차별이 생긴다. 이 차이의 근거는 인생으로 출발할 때에 가지고 있는 생리적이고 정신적인 선천적 소질이며, 여기에 성장하면서 직면하는 특수한 환경이나 경험이 덧붙여진다. 인격의 이러한 개인적 기반은 두 개의 유기체가 육체적으로 결코 동일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어떠한 사람과도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자아의 순수한 성장은 항상 이러한 특수한 기반 위에 서 있다. 그것은 하나의 유기적인 성장이며, 이러한 한 사람의 인간에게만 또 그에게만 고유한 하나의 핵심 전개다. 자동적인 자아의 전개는 이에 반하는 유기적인 성장은 아니다. 거기서는 자아 기반의 성장이 방해되어 거짓 자아가 그 위에 놓여져 있다. 거짓의 자아란 본질적으로 사고나 감정이 외부적인 형식을 받아들인 데 불과하다. 유기적인 성장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특수성에 대해 최고의 경의를 표할 때만 가능하다. 자아의 독자성에 대한 이러한 존경과 그 계발은 인간 문화의 가장 가치 있는 성과다. 그리고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바로 이 성과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인 나, 역시 사회적 동물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나'입니다. 온전한 내가 타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남이 되어보지 못한 나는 타자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에 취약합니다. 따라서 우리 개개인은 타자들의 존재 공간인 사회에 참여하기 전, 한 가지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성찰을 완벽히 마치고, '나의 존엄'을 철저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사회를 향한 진정한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켜나가는데에 '자유'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에게 자유가 있다고 믿을 때 '자기존엄'이 따라온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자유롭다고 믿을 때 타자의 자유를 존중할 수 있고, 나의 존엄성을 믿을 때 타자가 존엄한 존재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자유와 존엄은 사회에 참여하기전에 충분히 지켜져야 할 전제 조건이 됩니다.
"너를 자기 밖에서 구하지 마라"는 말처럼, 자기 자신을 사회에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은 너무 바보같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신뢰>,<자유론>,<독서와 논술1>,<자기를 위한 인간>,<소유냐 삶이냐/사랑한다는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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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독서평<논증하는 글쓰기의 기술_채석용.소울메이트> (0) | 2020.0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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