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2020년 6월 27일, 최인철의《프레임》을 읽고,,





안녕하세요~ 김찌입니다. 

저는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읽는 편인데요. 지금 읽고 책으로는 종이책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통찰과 역설_천공》이고요. 전자책으로는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지금 시작하는 생각 인문학_이화선》과 양주시도서관에서 대여한 전자책 《다크호스_토드 로즈. 오기 오가스》와 《프레임_최인철》이 있습니다. 


   여러 권을 책을 동시에 읽는 것이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다 보니, 이젠 완전히 익숙해져서 불편함이나 특별한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한 번에 한 권의 책만 읽는 게 부담스럽고 힘들어 졌어요. "이 책은 너무 좋은 책이라서 다른 책에 한눈 팔지 않고 쭉 읽어야 해!"라고 다짐해도 지키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공부에 왕도가 없는 것처럼 '독서에는 왕도가 없다.'는 생각으로 독서에 임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유시민작가의 근황이 갑자기 궁금해져서,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나! 싶은 생각에 유튜브로 유시민작가를 검색해 봤는데요. 새로운 소식은 아니었지만, 성장문답에서 유시민 특강을 발견하여 시청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성장문답]글쓰기가 두려운 당신이 반드시 들어야 할 대답'이라는 동영상의 한 장면을 캡쳐 한 것인데요. 책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논리적 글쓰기를 하려면 추상적 개념을 담은 어휘를 많이 알고 명료한 문장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추상적 개념을 익히려면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인문학과 자연과학 교양서도 많이 읽어야 한다. 힘 있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좋은 문장을 쓰고 싶어서 논증의 기술을 다룬 책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런 책을 읽는다고 해서 논리가 분명하고 힘이 있는 문장을 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교양서는 추상적 개념과 논리적 문장을 담고 있다. 책 전체가 중요한 사실과 개념, 그것들 사이의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다룬다. 좋은 문장으로 쓴 흥미로운 교양서를 반복해서 읽으면 《토지》를 반복해서 읽을 때와 같은 효과가 난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읽고, 바로 구입한 책이 《자유론》과 《코스모스》인데, 평소 존경하는 유시민 작가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매체를 통해서 10번 정도 읽으라고 했는데, 아직 한 번 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는데요. 이렇듯 한 권의 책을 읽다 보면 연관되거나 연관되지 않아도 어떤 필요나 당위성에 이끌려 다른 책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패턴이 습관으로 이어져 오늘날 저의 독서 습관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습니다. 

    



서두가 길었는데요. 오늘 소개할 책은 최인철교수의 《프레임》입니다. 며칠 전에 포스팅 한 책이지만, 내용이 워낙 좋아서 지난번과는 다른 부분을 여러분께 소개하면서 개인적으로는 '필사'를 한다는 생각에 다시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상에는 너무 많은 프레임이 존재하는구나! 생각했고, 인간은 아는 것 만큼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말도 결국, '자신만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말들, '자신만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대한다.'는 것이 '세상의 진리'일 것입니다. 애써 찾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게 되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Chapter 04. 자기 프레임, 세상의 중심은 나


"자기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창구가

되는 것을 막을 순 없다. 하지만 지혜는 우리에게

이런 자기 중심성이 만들어내는 한계 앞에서

철저하게 겸허해질 것을 요구한다."



이미지 투사


   자기중심적인 프레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타인을 평가하거나 첫인상을 규정할 때 늘 "얼마나 똑똑한가?"라는 차원에서 본다. 누구를 만나든 "재는 똑똑해" "재는 능력 있어 보여" "재는 좋은 대학을 못 나왔어" "재는 성격만 좋아"라는 식으로 평가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늘 '좋은 사람(따뜻한 사람)'의 차원에서 타인을 평가한다. 가령 "정말 좋은 사람이야" "마음이 따뜻해"라는 식으로 말이다.

   심리학자 레비츠키(Paul Lewicki)의 연구에 따르면 타인을 능력 차원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도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정의할 때 능력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동일한 차원에서 평가하게 된다. 반면에 자신을 정의하는 데 있어 '따뜻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타인을 평가할 때도 동일한 차원에서 본다. 

   주변을 잘 살펴보라. 어떤 사람이 10명의 주변 사람을 평가할 때, 그 10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한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돈을 중시하는 사람은 그 10명의 사람을 돈으로 평가할 것이고, 날씬한 몸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타인들을 몸매로 평가할 것이다. 집이 없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은 집이 있을 것 같아' '아파트가 저렇게 많은데 왜 우리 집은 없은 거야?'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평가나 내용을 보면,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보다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많이 드러낸다. 그러니 자기 주변에 남을 헐뜯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주변 사람이 실제로 남을 헐뜯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남의 허물을 습관적으로 들춰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고 자기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까이해도 좋다. 그 사람은 누구와 있어도 상대방의 장점부터 보기 때문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옛말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셈이다.



   미국 코넬 대학교의 서턴버그 교수는 어리석음의 첫 번째 조건으로 '자기중심성'을 꼽는다. 이런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아주 재치 있게 보여주는 실험이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있었는데, 이 실험은 대학생 두 명을 한 조로 해서, 한 명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 어떤 노래를 연주하게 하고, 다른 한 명은 상대방이 손가락으로 연주한 노래 제목을 알아맞히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린 학생은 상대방이 노래 제목을 알아맞힐 확률이 50퍼센트는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 상대방이 노래 제목을 맞힌 비율은 2.5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연주는 가사도 그 어떤 허밍도 들을 수 없다. 드럼 소리나 키보드 멜로디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감흥 없는 무의미한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탁탁' 책상 치는 소리만 들린다. 그런데도 연주자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경험했던 그 환상적인 연주가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프레임에 갇힌 우리는 우리의 의사 전달이 항상 정확하고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전달한 말과 메모,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은 우리 자신의 프레임 속에서만 자명할 뿐, 다른 사람의 프레임에서 보자면 애매하기 일쑤다. 이러한 의사불통으로 인해 생겨나는 오해와 갈등에 대해 사람들은 서러 상대방의 무감각과 무능력, 배려 없음을 탓한다.


   부모들은 자녀에서 선행 학습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어린아이가 알기엔 벅차고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면서 왜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모르냐고 구박하기 일쑤다. 그 개념들이 어른들에게나 간단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이다. 남녀 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몇 시간째 토라져 있는 여자친구에게 위로는 커녕 "장난친 것 가지고 왜 그리 속 좁게 구냐?"며 되레 화를 내는 남자친구는 자신의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만 장난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모른다.

   우리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라며 상대방을 추긍하지만, 실상 개떡같이 말하면 개떡같이 들릴 수밖에 없다.



뇌 속의 자기 센터 '내전전두피질'


Polite(공손한) 단어를 제시하고 아래처럼 네 가지 질문이 주어졌다. 주어진 질문에 동의하면 컴퓨터 자판의 'P'를, 동의하지 않으면 'Q'를 누른다. 몇 개의 형용사로 이런 질문을 반복한다고 가정해보자.


1) 이 단어가 당신을 잘 나타냅니까?

2) 이 단어가 오바마 대통령을 잘 나타냅니까?

3) 이 단어가 대문자로 쓰였습니까?

4) 이 단어가 Rude(무례한)의 동의어입니까?


   4)번 질문은 제시된 단어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에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1)번과 2)번 역시 의미에 대한 질문이지만 1)번 질문(이 단어가 당신을 잘 나타냅니까?)을 받고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고 2)번 질문(이 단어가 오바마 대통령을 잘 나타냅니까?)을 받으면 '타인'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한다. 3)번(이 단어가 대문자로 쓰였습니까?)은 이 단어의 물리적 속성에 대한 질문이다. 3)번만 빼고는 모두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다. 


   이 실험에서 반복적으로 나온 결과는 1)번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단어를 가장 많이 기억했다. 똑같은 단어라도 '자기 자신'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하면 기억을 더 잘한다는 얘기다. "내가 정직한가, 공손한가, 창의적인가?"라고 물어보는 것이 "철수가 정직한가, 공손한가, 창의적인가?"라고 물어보는 것보다 훨씬 더 기억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자기'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떤 것이든 자기 자신과 관련지어 바라볼 때 기억이 잘되는 이런 현상을 '자기 준거 효과'라고 한다. 


   사람들이 어떤 단어를 '자기'와 관련짓는 작업을 할 때는 뇌의 영역 중 내전전두피질이라는 부위가 활발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단어라도 그 단어의 의미를 다른 사람과 연관 지어 생각하거나, 혹은 그 단의 의미가 아닌 물리적 속성으로 생각해볼 때는 내전전두피질 부위가 강하게 활동하지 않는다. 오직 그 단어가 자기 자신을 기술하는지를 생각할 때만 그 부분이 활성화된다는 점은 그 영역이 일종의 '자기 센터'임을 암시한다. 우리의 뇌 속에서도 '자기'는 글자 그대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셈이다.



   국민들이 읽고 말하고 보는 것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는 독재 정권처럼 '자기'라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리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자기'를 가리켜 '독재 정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며, 벗어나는 순간  삶의 여러 면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몰입의 즐거움》의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어떤 일에 깊이 몰입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어지는 상태를 '몰입'이라고 하고, 몰입 상태가 행복과 성취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또, 정신병리학자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자기 자신과 관련시켜 해석하는 경향이야말로 정신 건강을 해치는 주범 중 하나이며, 많은 심리학 연구들은 '자기'에 대한 지나친 생각이 남들과 자기 자신을 자주 비교하게 만들고 결국 행복을 저하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세상를 바라보는 소통의 창구가 되는 것을 막을 순 없다. 하지만 지혜는 우리에게 이런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한계 앞에서 철저하게 겸허해질 것을 요구한다.



2020년 6월 27일, 최인철의《프레임》을 읽고,,



   '나는 너를 알지만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은 '나'의 입장에서 타인은 짧은 시간에도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한 존재'이지만, 나 자신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복잡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단 5분만에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한다면 썩 기분이 좋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을 파악하는데 몇 마디의 대화와 몇 분의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성격이나 신념 같은 내적인 요소들로 설명하지만, 우리 자신의 행동은 상황적인 요인들로 설명한다.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기 때문이고, 내가 늦은 것은 차가 막혔기 때문이다. 네가 내 생일을 잊어버린 것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고, 내가 네 생일을 잊어버린 것은 실수였다. '넌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 그런 실수를 하는 것이고, '난 어쩌다 보니' 그런 실수를 한 것이다. 네 마음속에는 진짜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심한 말도 서슴지 않는 것이고, 나는 단지 실수로 말이 잘못 나왔을 뿐이라고 합리화시킨다.

   타인의 행동에 대한 이런 식의 판단은 인간관계에서 심각한 오해를 불러온다. 상대방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상항을 먼저 고려하기보다는 '넌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규정짓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혜는 내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는 마음의 습관에서 나온다.



   위의 마지막 문단의 글을 읽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 스스로를 선하고 이타적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저만의 착각이었던 것일까요?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은 이타적 배려심이 많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제 경우는 저 자신이 선하거나 이타적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선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었나! 이런 사람들은 이용하기도 쉬우니까! 그랬던 것일까!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과 행동이 내 본모습이라면 어찌해야 하는 걸까요. 인간이 한 단면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존재이고, 한 인간에게 여러 개의 마음과 자아가 있다지만, 독서를 통해 부족한 면을 보완하고, 지혜를 얻고자 했던 지난 날들은 도대체 뭐였을까요. 안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일까요. 안되는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만 아니라면 언제라도 좋겠습니다. 남은 인생 책과 더불어 살면서 언젠가 '김찌 많이 성장했네!'라는 진정어린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될 테니까요.  





2020년 6월 27일, 최인철의《프레임》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