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다산의 마지막 습관》


다산처럼 산다는 것

"점차 하던 일을 거둬들여 마음 다스림(치심)공부에 힘을 쏟고자 합니다. 하물며 풍병은 뿌리가 이미 깊어 입가에 항상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는 늘 마비 증세를 느낍니다. 머리에는 잉어 낚시하는 늙은이들이 쓰는 털모자를 쓰고 지냅니다. 근래 들어서는 또 혀마저 굳어 말이 어눌합니다.


  스스로 살날이 길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꾸 바깥으로 마음을 내달리니, 이것은 주자께서도 만년에 뉘우치신 바입니다. 어찌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고요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려면 세간의 잡념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어지러워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저술만 못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문에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산이 둘째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다. 같은 시기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형이 건강을 생각해 당분간 자제하라고 권하자 다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학문과 수양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던 다산조차 마음 다스림에는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다산은 스스로 쓴 묘비명에서 "어릴 때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20년 동안이나 세속의 길에 빠져 다시 선왕의 훌륭한 정치가 있는 줄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여가를 얻게 되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마음공부를 마지막 공부로 삼겠다고 다짐했지만,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고뇌했다.


  험난한 귀양 생활에 몸은 점차 쇠약해졌다. 중풍이 심해지고, 오한을 견디기도 힘들었다. 마음도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고난의 극한상황, 절망에 처한 상태였다.


  다산은 이러한 순간, 집필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복숭아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날 정도로,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한자리에 앉아 글을 쎴다. 그 어떤 마음공부에서도 찾지 못했던 마음의 안정을 집필에 몰입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마음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림으로써 마음을 다스렸던 것이다. 



수신, 잃어버린 나를 찾아 단단히 몸에 새기는 공부

 다산은 마흔이 될 때까지 누구나 부러워할 인생을 살았다. 어린시절부터 타고난 '문재'로 천재 소리를 들었고, 성균관에 들어가서도 뛰어난 재주로 정조의 눈에 들었으며 이후 과거에 급제하면서 일찌감치 관직읠 길로 나섰다. 그리고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그는 마흔이 채 못 된 나이에 형조참의의 자리에 오르며 정점을 찍었다. 심지어 나이든 형조판서의 대행을 명받아서 지금의 장관 직책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산은 이처럼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를 가리켜 '나'를 잃어버린 시간이었다고 했다.


 '나'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해 드나듦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유도하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화가 겁을 주어도 떠나가며, 새까만 눈썹에 흰 이를 가진 미인의 요염한 모습만 보아도 떠나간다. 그런데 한 번 가면 돌아올줄 몰라 붙들어 만류할 수 없다. 세상에서 '나'보다 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사 지키지 않는가.


  큰형인 정약현이 당오를 '수오재'로 짓자 느낀 바를 쓴 <수오재기>에 실린 글이다. '수오'는 '나를 지킨다'는 뜻으로, 화를 입었던 다산의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지켰던 큰형의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그런 형을 부러워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안타까움을 담아 이 글을 지었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잘못 간직했다가 나(오)를 잃은 자다. 어렸을 때 과거가 좋게 보여서 과거 공부에 빠져 지낸 세월이 10년이었다. 마침내 처지가 바뀌어 조정에 나아가 검은 사모에 비단 도포를 입고 미친 듯이 큰길을 뛰어다니 세월이 12년이었다. 또 처지가 바뀌어 한강을 건너고 조령을 넘어, 친척과 분묘를 버리고 곧가로 아득한 바닷가의 대나무 숲에 달려와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는 나도 땀이 흐르고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나의 발꿈치를 따라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에 끌려서 온 것인가? 아니면 해신이 부른 것인가? 자네의 가정과 고향애 모두 '초천'에 있는데, 어찌 본고장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물었다. 끝끝내 나라는 것은 멍한 채로 움직이지 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얼굴빛을 보니 얽매인 곳이 있어서 돌아가고자 하나 가지 못하는 듯했다. 마침내 붙잡아서 함께 이곳에 머물렀다.


  다산의 고백이 처절하다. 다산은 누명을 쓰고 머나먼 땅으로 귀양을 떠났을 때뿐 아니라 과거를 준비하고 성공을 구가했던 20여 년까지도 '나'를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행이 다산은 '나'를 찾았다 의외로 머나먼 바닷가 귀양지에서였다. 그의 삶에서 가장 길고 큰 비극의 시간이었지만 다산은 그곳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았다.


  최악의 절망에서, 삶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극단적인 고난의 시간에서 다산이 자신을 찾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무엇이 잃어버린 '나'를 찾게 했을까? 그것은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가 학문에 있고, 오직 집필을 통해서만이 삶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학자'라는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힘이 된 것은 바로 《소학》에서 얻은 수신이었다.


 옛날 아동교육에서는 물 뿌리고, 응대하고 대답하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스승을 존경하고 벗과 친하게 지내는 도리를 가르쳤다. 이것은 모두 《대학》에서 가르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본이 된다. 어릴 적에 배우고 익히도록 한 까닭은 배움이란 지혜와 함께 자라고, 가르침은 마음과 함께 이뤄지게 해서 그 배운 것과 실천이 서로 어그러져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근심을 없게 하고자 함이다.


  주자는 어른의 공부인 《대학》을 배우기 전에 반드시 《소학》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대학》은 나라와 천하를 평안히 다스리는 큰뜻을 이뤄가는 공부다. 하지만 큰 일은 반드시 일상의 도리를 지키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일상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큰 이상을 외치는 것은 허상에 발과하기 때문이다. 그 근본이 바로 《소학》의 가르침, 수신의 공부다. 근본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의 올바른 도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몸에 익혀 실천할 수도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식을 채우기만 하고 근본이 없다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헛똑독이가 될 수밖에 없다. 축적한 지식 또한 실천할 수 없는 반쪽짜리 지식이 될 뿐이다. 


······


  하지만 다산이 《소학》에 집중한 데는 또 하나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소학》을 통해 귀양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바로 세우고, 큰일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수신을 깨달았다. 다산은 귀양지에서 쓴 《심경밀험》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실하게 실천할 방법을 찾아보니 오직 《소학》과 《심경》만이 특출나게 빼어났다. 진실로 이 두 책에 참잠해 힘써 행하되 《소학》으로 외면을 다시리고 《심경》으로 내면을 다스린다는 현인의 길에 이르지 않을까?"